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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리(목랑)豆豆里 / 木郞

신라 경주에서 비형랑 이래 성대히 모셨다는 나무의 신령으로, 고려 무신 이의민이 집에 사당을 두고 섬겼고 몽골 침입 때는 병장기를 달라 요구했다는 도깨비의 우두머리 격 신이다.

다른 이름: 두두을 · 목랑 · 목매 · 목신

신령고려경북 경주전승상 위험도 ●●○○○

정체와 생김새

두두리(豆豆里)는 신라의 서울이던 경주 일대에서 모시던 나무의 신령으로, 한자로는 목랑(木郞)이라 적고 두두을(豆豆乙)이라고도 썼다. 고려 시대 기록은 경주 사람들이 목랑을 두두을이라 부른다고 전하며, 나무에 깃든 도깨비라는 뜻의 목매(木魅)로도 부른다. 오늘날에는 흔히 도깨비의 우두머리이자 도깨비 신앙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이야기된다.

생김새는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이름에 나무가 들어가고 목매라 불린 것으로 보아 나무로 깎아 만든 신상, 곧 목각 우상을 신체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며, 곽재식은 이를 나무를 깎아 원통형으로 만든 사람 조각상 비슷한 것으로 짐작하면서 경주 왕룡사 목조 문무인상의 모습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기록 속 두두리는 사람처럼 울며 말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하나, 그 형상을 직접 적은 기록은 없다.

두두리는 한 몸의 신이라기보다 여럿이 함께 다니는 무리로도 나타난다. 고려 고종 때 경주에서 다섯 목랑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그 예로, 신라 비형랑이 거느렸다는 귀신 무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름의 두두리를 두드린다는 우리말과 잇고 절굿공이나 방망이에서 도깨비가 생긴다는 뒷날의 믿음과 연결하는 풀이도 있으나, 확실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

가장 이름난 이야기는 고려 무신 정권의 실력자 이의민과 얽힌 것이다. 경주 출신인 이의민은 개경의 자기 집에 두두을을 모시는 사당을 차리고 날마다 복을 빌었는데, 어느 날 사당에서 곡소리가 났다. 두두을이 울면서 자신이 오랫동안 이 집을 지켜 주었으나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려 하니 의탁할 곳이 없어 운다고 했고, 얼마 뒤 이의민은 최충헌 형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몽골 침입기의 이야기도 전한다. 고종 18년인 1231년 10월 경주에서 다섯 목랑이 나타나, 병장기를 보내 주면 몽골 군사를 물리쳐 주겠다 하고 사람의 길흉화복을 좌우할 수 있다는 내용의 시를 지어 집권자 최우에게 올렸다. 최우는 내시 김지석을 보내 요구한 물건을 주었으나 아무 영험이 없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두두리의 뿌리는 신라 진지왕의 혼과 도화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비형랑에 닿는다. 비형랑은 밤마다 귀신 무리를 거느리고 놀며 하룻밤에 다리를 놓았고, 신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적어 붙여 귀신을 쫓았다. 조선 전기의 지리서는 비형랑 이래 세속에서 두두을을 매우 성대하게 섬겼다고 적어, 비형랑의 귀신 무리와 두두리를 한 줄기로 보았다.

문헌 속 기록

두두리라는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고려 시대의 기록이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에 경주 사람들이 두두을이라는 목매를 섬겼고 이의민이 집에 신당을 지어 모셨다는 내용이 있고, 권54 오행지에 1231년 다섯 목랑이 최우에게 병장기를 요구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의민 열전은 두두을이라는 이름으로, 오행지는 목랑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신을 부른다.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에는 목랑을 세속에서 두두리라 부르며, 경주 남쪽의 왕가수라는 숲에서 이 신을 제사했다고 적혀 있다. 이 책은 비형랑 이래 두두리를 성대하게 섬겼다고 하여 『삼국유사』의 비형랑 이야기와 이어 놓았다. 왕가수가 오늘날 어디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는 두두리라는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비형랑이 거느린 귀신 무리와 길달의 이야기가 두두리 신앙의 뿌리로 여겨진다. 근래의 연구는 두두리를 경주라는 특정 지역의 신이 정치 세력을 따라 개경까지 옮겨 간 사례로 설명한다. 후원자가 몰락하면서 신도 함께 잊혔다는 것이다.

막는 법과 민속

두두리는 쫓아야 할 요괴가 아니라 모셔서 복을 비는 신이었다. 경주 남쪽 왕가수에서 제사를 올렸고, 이의민처럼 집 안에 따로 사당을 두고 날마다 빌기도 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병장기를 요구하며 대신 싸워 주겠다고 했으니, 무기를 바치면 지켜 준다는 무신(武神)의 성격도 있었다.

두두리를 섬기는 신앙은 고려 후기 이후 점차 사라져 조선 시대에는 옛 자취로만 기록되었다. 정확히 언제 끊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근래의 연구는 두두리가 정치 후원자를 따라 제자리를 떠났다가 그 후원자가 몰락하면서 신으로서의 위상을 잃었다고 본다. 오늘날 경주에서 두두리를 모시는 제사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두두리의 흔적은 도깨비 민속 속에 남아 있다는 견해가 있다. 나무로 만든 물건에서 도깨비가 생긴다는 믿음, 도깨비가 다리와 보를 하룻밤에 쌓는다는 이야기, 도깨비가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 모두가 나무의 신이자 귀신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두두리와 통한다.

비슷한 존재와 구분

두두리는 뒷날의 도깨비와 가장 가깝지만 성격이 다르다. 도깨비가 사람과 씨름하고 장난치는 친근한 요괴라면, 두두리는 지역의 제사를 받고 나라의 집권자에게 시를 보내는 격이 높은 신이었다. 도깨비의 조상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같은 존재라고 하기는 어렵다.

비형랑은 두두리 신앙의 시조 격으로 여겨지나, 비형랑 자신은 사람과 귀신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두두리는 그가 거느린 무리 혹은 그 신앙이 굳어진 신이다. 나무의 신령이라는 점에서는 마을의 당산나무 신과도 닮았다. 그러나 두두리는 특정 나무가 아니라 나무로 깎은 신상을 매개로 하고, 여럿이 움직이며 말을 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지금의 모습

두두리는 오래 잊혔다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요괴와 신을 정리하는 흐름 속에서 다시 조명되었다. 도깨비의 원형을 찾으려는 관심이 커진 것이 계기였다. 뿔 달린 오니 대신 나무 신령 두두리를 한국 도깨비의 뿌리로 소개하는 글이 늘었다.

창작물에서는 두두리가 경주를 지키는 옛 신, 혹은 도깨비들의 왕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고려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두두리를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해 이의민 곁에 두기도 했다. 옛 기록이 짧은 만큼 상상이 채울 자리가 넓어, 두두리는 앞으로도 여러 모습으로 다시 그려질 가능성이 큰 신이다.

참고한 자료

함께 읽기

이 글은 여러 전승과 옛 기록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으로, 지역과 시대에 따라 이야기가 다를 수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이나 보탤 전승이 있으면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