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와 생김새
금돼지는 신라의 학자 최치원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요괴로, 온몸이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돼지다. 한자로는 금저(金猪) 또는 금돈(金豚)이라 적으며, 바닷가 바위 굴속에 살면서 새로 부임한 고을 수령의 아내를 차례로 납치해 갔다고 한다. 조선 시대 한문 소설 『최고운전』과 전북 군산, 경남 창원 등지의 구전이 이 요괴의 이야기를 전한다.
『최고운전』에서는 밤이 되면 바위가 열리고 굴 안에서 금돼지가 납치한 여인들을 데리고 지내는 것으로 나오며, 금돼지는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다가 여인에게 속아 제 약점을 털어놓는다. 구전에서는 굴 안에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죽은 뒤에야 큰 돼지의 모습이 드러났다고도 한다.
이 요괴의 가장 큰 특징은 약점이 사슴 가죽이라는 점이다. 온갖 재주를 가졌으면서도 사슴 가죽만은 몹시 두려워하여, 사슴 가죽 끈이 몸에 닿으면 힘을 잃고 죽는다고 한다. 이 약점을 여인의 지혜로 알아내는 대목이 이야기의 고비를 이룬다.
전해 오는 이야기
신라 때 최충이라는 사람이 문창이라는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했다. 그 고을에서는 새 수령이 올 때마다 그 아내가 사라지는 일이 되풀이되었으므로, 최충은 아내의 손목에 명주실을 매어 두었다. 과연 어느 날 아내가 사라졌고, 최충이 실을 따라가 보니 뒷산 바위틈 굴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굴 안에는 이제까지 사라진 여인들이 금돼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최충의 아내는 금돼지를 속여 사슴 가죽을 씹어 뒤통수에 붙이면 죽는다는 약점을 알아내고, 마침 자기 주머니 끈이 사슴 가죽인 것을 이용해 금돼지를 죽였다. 구전에서는 금돼지가 죽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커다란 돼지가 나자빠져 있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얼마 뒤 아들을 낳았는데, 최충은 이 아이가 금돼지의 자식이라 의심하여 내다 버렸다. 그러나 짐승들이 아이를 피하고 밤이면 선녀가 내려와 젖을 먹이는 등 하늘이 아이를 돌보았고, 하늘의 선비가 내려와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 아이가 뒷날 당나라에 건너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이라는 것이다.
문헌 속 기록
금돼지 이야기의 가장 오랜 기록은 작자 미상의 한문 소설 『최고운전』이다. 16세기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 중기 문인들의 글에 이 이야기를 언급한 흔적이 있어 양반 사회에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로 옮긴 『최충전』과 『최문헌전』 등 여러 이본이 전하고, 근래에는 창작 시기를 14세기까지 끌어올리는 견해도 나왔다.
역사서인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금돼지 이야기가 없다. 최치원은 857년에 태어나 열두 살에 당나라로 유학한 실존 인물이며, 금돼지 탄생담은 뒷날 영웅의 신이한 출생을 꾸미기 위해 붙은 설화다. 연구자들은 이 소설이 당나라에 맞선 최치원의 승리를 그려 민족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아들이 아버지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뛰어난 것으로 그려 당시 신분 질서를 흔드는 구조를 지녔다고 본다.
구전으로는 한국구비문학대계에 경남 거창에서 채록된 최고운 이야기가 있다. 굴속의 여인들이 금돼지가 녹피를 두려워한다고 알려 주고 술에 취한 틈에 목을 쳤다는 줄거리로, 소설과 큰 줄기가 같다. 전북 군산의 내초도에는 금돼지굴이라 불리는 굴이 있어 최치원이 거기서 태어났다고 하며, 이 때문에 옥구 지방에서는 경주 최씨를 돼지 최씨라 부르기도 했다.
막는 법과 민속
금돼지를 막는 법은 오직 사슴 가죽뿐이다. 이야기 속에서 금돼지는 힘으로 당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 약점은 붙잡힌 여인이 지혜로 캐묻고 나서야 드러난다. 강한 요괴일수록 뜻밖의 작은 것에 약하다는 옛이야기의 문법이 여기서도 되풀이된다.
손목에 명주실을 매어 사라진 사람의 행방을 좇는 방법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산삼으로 변한 아이나 둔갑한 짐승의 정체를 밝힐 때도 쓰이는 옛이야기의 오래된 장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실 한 올로 붙들어 둔다는 생각이 여기에 담겨 있다.
군산 내초도의 금돼지굴과 마산 앞바다의 돝섬은 이 이야기와 맺어진 장소다. 돝섬에는 금돼지가 사람을 해치자 최치원이 섬을 향해 활을 쏘아 괴변을 없앴다는 별개의 전설이 있고, 오늘날에는 황금돼지가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관광 이야기로 이어진다. 요괴였던 금돼지가 복을 주는 돼지로 바뀐 셈이다.
비슷한 존재와 구분
굴속에 여인들을 가두어 두는 괴물을 물리치고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는 지하국 대적 퇴치 설화라 하여 널리 퍼져 있다. 금돼지 이야기는 그 구조를 따른다. 그러나 이본에 따라 붙잡힌 아내가 괴물의 약점을 알아내 직접 물리치기도 한다는 점과 그 뒤에 영웅의 탄생이 이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구미호가 사람으로 둔갑해 사람을 홀리는 여우라면 금돼지는 사람을 채 가되 굴 안에서만 사람 모습을 하는 돼지다. 이무기가 물의 괴물이고 지네장터의 지네가 산의 괴물이라면 금돼지는 바닷가 바위 굴의 괴물로, 각기 사람을 제물로 삼는다는 점에서 한 계열에 놓인다. 다만 금돼지는 죽은 뒤 영웅의 아버지로 의심받는다는 독특한 뒷이야기를 가진다.
지금의 모습
금돼지는 황금돼지해가 돌아올 때마다 재물과 복의 상징으로 언급된다. 그래서 요괴로서의 모습보다 길한 짐승으로서의 모습이 앞서게 되었다. 마산 돝섬을 비롯한 관광지에서는 금돼지가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 소개된다.
그러나 요괴 도감류 책과 웹툰, 게임에서는 여인을 납치하는 굴속의 괴물이라는 본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사슴 가죽이라는 뜻밖의 약점, 굴 안의 사람 모습과 굴 밖의 돼지 모습이라는 이중성이 이야기 장치로 즐겨 쓰이는 경향이 있다. 최치원의 출생 비밀과 얽힌 만큼 역사 판타지에서 자주 불려 나오는 요괴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