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와 생김새
업은 집안의 재물 운을 맡아 지켜 주는 가신이다. 성주나 조왕처럼 뚜렷한 신체를 두고 모시기보다, 집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깃들어 있다고 믿어졌다. 업이 들어오면 살림이 불어나고 업이 나가면 집이 망한다고 하여, 부자가 되는 운 그 자체를 짐승의 모습으로 떠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업의 정체는 대개 구렁이로 나타나며 족제비와 두꺼비도 흔하다. 이를 업구렁이, 업족제비, 업두꺼비라 불렀고, 드물게 소나 돼지, 닭, 개, 고양이가 업이 되기도 했다. 사람이 업인 경우도 있어 이를 인업이라 하는데, 집 앞에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업둥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풀이된다.
업이라는 말의 뿌리는 분명하지 않다. 한자 업(業)에서 왔다고 보기도 하고, 몽골의 오보나 일본의 우부스나처럼 이웃 지역의 신 이름과 관련된 우리말이라는 견해도 있다. 업성조, 업대감 같은 신격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
업 이야기의 뼈대는 '들어오면 흥하고 나가면 망한다'는 것이다. 어느 집 곳간에 큰 구렁이가 들어와 살면서 살림이 불어났는데, 며느리가 그것을 보고 놀라 내쫓거나 해친 뒤로 집이 기울었다는 이야기가 전국에 퍼져 있다. 구렁이가 담을 넘어 나가는 것을 본 날부터 집안에 흉사가 잇따랐다는 목격담도 많다.
두꺼비 업도 많이 이야기된다. 부엌이나 장독대에 사는 두꺼비를 해치지 않고 두었더니 그 집에 재물이 모였다는 이야기, 두꺼비 허물이 재물을 끝없이 낳는 화수분 노릇을 했다는 이야기가 채록되어 있다. 곳간의 쥐를 잡는 족제비도 살림을 지키는 짐승으로 여겨지기 쉬웠을 것이다.
18세기 학자 이덕무는 부잣집에서 곳간 안에 사는 구렁이나 족제비 모양의 신에게 흰죽을 쑤어 바친다고 적고, 망아지처럼 생긴 구업이라는 것도 소개했다. 업이 달아나면 집이 따라서 망한다는 말도 그가 남긴 것이다. 구렁이가 광 밑에 굴을 뚫으면 그 곡식이 몇 배로 불어난다고 하여 부귀사라 부르기도 했다.
문헌 속 기록
업 신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실린 「이목구심서」가 부잣집의 업 풍속을 전하는 이른 기록으로, 여기서는 업을 창고 속의 신으로 설명하고 구렁이와 족제비뿐 아니라 망아지 모양의 업까지 들었다. 이로써 늦어도 18세기에는 지금과 같은 업 관념이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민속 조사에서는 중부 지방에서 업의 신체를 뒤꼍에 짚주저리를 씌워 모시는 사례가 확인되었다. 항아리에 쌀을 담아 업항아리로 모시는 집도 있었다. 반면 영남과 호남에는 업이라는 관념이 거의 없고, 제주에서는 뱀신이자 재신인 칠성을 모셔 칠성본풀이라는 신화가 따로 전한다.
업은 신격 이름은 있어도 따로 큰 제사를 받지는 않았다. 시월 상달 고사나 집안 고사 때 다른 가신과 함께 떡과 음식을 받는 정도였다. 이런 조용한 성격 때문에 업 신앙은 기록에 적게 남았고, 오늘날에는 사례를 찾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막는 법과 민속
업은 물리치는 존재가 아니라 붙들어 두어야 하는 존재다. 집에서 구렁이를 보아도 죽이거나 쫓지 않고 조용히 두는 것이 첫째 금기였다. 구렁이가 밖으로 나타나면 업이 나가려는 신호로 보고 정성을 다해 달랬으며, 집안에 부정한 일이 있으면 업이 떠난다고 하여 몸가짐을 조심했다.
중부 지방에서는 뒤꼍이나 장독대 옆에 짚가리를 세우고 그 안에 업이 산다고 여겨 고사 때 떡과 술을 놓았다. 쌀을 담은 단지를 업으로 모시는 집도 있었다. 이덕무의 기록처럼 흰죽을 쑤어 바치는 것도 오래된 대접법이다.
업 신앙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컸다. 곳간과 부엌을 맡은 주부가 업을 모시고, 업이 떠난 사연도 며느리가 놀라 소리쳤다거나 해쳤다는 식으로 여성의 행동과 얽혀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재물을 지키는 책임이 집안 여성에게 있다고 본 옛 생각이 여기에 담겨 있다.
비슷한 존재와 구분
업은 사람의 넋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짐승의 모습을 한 신이라는 점에서 귀신과 다르다. 같은 구렁이라도 이무기는 물속에 살며 용이 되기를 기다리는 요괴이고, 업구렁이는 집 안에 살며 재물을 지키는 신이다. 집터를 맡은 터주, 집 자체를 맡은 성주와 함께 가신에 속하지만, 업만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신이라는 점이 다르다.
도깨비도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지만, 도깨비의 재물은 변덕스럽고 오래가지 않는 데 비해 업의 재물은 업이 머무는 한 이어진다. 잡귀인 객귀가 손님처럼 떠돌다 사람에게 붙는 존재라면, 업은 반대로 한 집에 눌러앉아야 복이 되는 존재다. 또 업은 이를 위하고 믿는 사람에게만 눈에 뜨인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의 모습
업 신앙은 20세기 후반 주거 형태가 바뀌면서 거의 사라졌다. 곳간과 뒤꼍이 없는 집에는 구렁이가 살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업둥이'나 '업이 나갔다' 같은 말은 남아 있고, 뱀띠 해가 되면 집안 구렁이 이야기가 신문 칼럼에 되살아나곤 한다.
현대 창작물에서는 업이 곳간을 지키는 구렁이 신이나 집에 깃든 수호 요괴로 그려지며, 재물에 대한 집착이 신이 되었다는 식의 해석이 더해지기도 한다. 게임에서는 특정 물건을 지키는 존재, 함부로 건드리면 복이 달아나는 존재로 규칙화되는 경향이 있다. 뱀을 무서운 짐승이 아니라 복을 가져오는 손님으로 본 옛사람의 눈길이 이런 작품들에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