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와 생김새
여귀(厲鬼)는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었거나,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내 줄 후손이 없어 떠도는 귀신을 이르는 말이다. 제사를 받지 못한다 하여 무사귀신(無祀鬼神), 호적에 이름이 없는 귀신이라 하여 무적귀신이라고도 불렀다. 옛사람들은 이런 귀신이 굶주리고 원통한 나머지 사람에게 붙어 병을 옮기고 마을에 돌림병과 흉년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여귀는 특정한 한 귀신의 이름이 아니라 불행하게 죽은 온갖 혼령을 아우르는 무리의 이름이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 물과 불에 죽은 사람, 도적에게 죽거나 남에게 재물과 아내를 빼앗기고 죽은 사람, 억울하게 형벌을 받아 죽은 사람, 역병과 짐승과 독충에 죽은 사람, 얼어 죽고 굶어 죽은 사람,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 담이 무너져 죽은 사람, 아이를 낳다 죽은 사람, 벼락과 낙상으로 죽은 사람,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모두 여기 든다. 여제의 제문은 이들을 열다섯 가지로 나누어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 불렀다.
따라서 여귀에게는 정해진 생김새가 없다. 굿이나 제사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리로 다루어졌고, 병이 돌면 그 병이 곧 여귀의 얼굴이었다. 다만 한을 품은 채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혼령이라는 인상이 강했고, 이 굶주림을 달래는 것이 곧 여제의 목적이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
여귀가 병을 옮긴다는 생각은 돌림병이 마을을 휩쓸 때마다 되살아났다. 실제로 1671년(현종 12) 돌림병이 극심하자 나라에서는 동교와 서교에 새로 단을 모으고 돌림병으로 죽은 역귀(疫鬼)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라의 큰 전쟁 뒤에도 여귀 이야기가 따랐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평양성 싸움 뒤, 조정은 수많은 전사자의 넋이 원귀가 되는 것을 걱정하여 여제의 예에 따라 단을 쌓고 제문을 지어 위로하게 했다. 이름 없이 죽은 병졸들이 여귀가 되어 산 사람을 해치기 전에 나라가 먼저 그들을 손님으로 맞아 달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옛 이야기 속 원귀들은 대개 자신을 억울하게 죽인 사람을 찾아가지만, 여귀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을 전체에 재앙을 내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누가 잘못했는지 따지지 않고 병이 번지니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했다. 그래서 여귀 이야기는 한 사람의 복수담이라기보다 공동체가 함께 겪는 재난의 이야기로 전해졌다.
문헌 속 기록
여제의 뿌리는 중국의 옛 예서에 나오는 태려, 국려, 족려 제사와 명나라의 『홍무례제』에 있다. 조선에서는 1401년 태종 1년 정월에 권근이 올린 상소가 출발점이다. 권근은 백성에게 공이 있는 사람은 모두 제사를 받는데 제사 없는 귀신에게도 태려와 국려의 법이 있으니, 명나라 제도를 모두 따르면서 유독 여제 한 가지만 거행하지 않는 것은 어두운 곳에서 원통함을 품는 자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여제는 국가 제사의 목록에 올랐고, 도성 밖 북쪽에 여단(厲壇)을 쌓아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국조오례의』는 청명날과 7월 보름, 10월 초하루 세 차례를 정기 여제일로 정했으며, 부·주·군·현의 지방 고을에도 여단을 두어 수령이 제사를 맡게 했다. 여제에 앞서 성황신에게 먼저 고하여 성황신이 떠도는 혼령들을 불러 모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성황발고제를 지냈는데, 여단에 성황신 한 자리와 무사귀신 열다섯 자리를 모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병이 크게 돌거나 가뭄이 들면 정해진 날 외에 별여제를 지냈다. 인조 때부터 영조 때까지의 여제 기록을 모은 『여제등록』이 남아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여제를 명하거나 여단을 고쳐 쌓은 기사가 여러 차례 보인다. 도성 북교에 있던 여단은 폐지된 지 오래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無祀之鬼 亦有泰厲國厲之法 … 惟此厲祭一事 獨不擧行
제사 없는 귀신에게도 태려·국려의 법이 있는데 … 오직 이 여제 한 가지만 거행되지 않습니다.
『태종실록』 태종 1년(1401) 1월 14일, 권근의 상소
막는 법과 민속
여귀를 막는 가장 큰 방법이 곧 여제였다. 나라가 제사를 지내 굶주린 혼령을 먹이고 이름을 불러 위로하면, 그들이 원한을 풀고 산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믿었다. 제사를 받지 못하는 것이 원한의 뿌리이므로, 제사를 주는 것이 곧 치료였던 셈이다.
민간에서는 무당이 굿을 열어 떠도는 잡귀와 여귀를 먹이고 보내는 거리굿을 했다. 굿의 끝머리에 뜬귀신과 객귀를 위해 밥과 나물을 뿌리는 절차는 여제와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마을 단위로는 역병이 돌 때 마을 어귀에 금줄을 치고, 병을 옮기는 귀신을 배에 실어 보내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여제는 조선이 끝난 뒤에도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마을 제사 조사 자료에 여제의 제문이 그대로 실려 있어, 20세기 전반까지 지방에서 여제의 흔적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일부 지역에서 마을 제사 뒤에 무주고혼을 위한 상을 따로 차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비슷한 존재와 구분
여귀는 객귀, 손말명, 몽달귀신 같은 개별 원귀들을 모두 품는 넓은 이름이다. 객귀가 타향에서 죽은 혼령이고 손말명과 몽달귀신이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처녀와 총각의 혼령이라면, 여제의 제문은 이들을 모두 무사귀신의 갈래로 한자리에 불렀다. 개별 원귀가 한 집안이나 한 사람을 괴롭히는 데 비해, 여귀는 무리로서 마을과 나라에 역병을 부른다.
도깨비나 두억시니 같은 요괴는 사람의 넋이 아니므로 여귀와 다르다. 마마와 같은 특정한 병을 맡은 역신은 신으로 대접받으며 손님굿으로 모셔지지만, 여귀는 신이라기보다 달래서 보내야 할 딱한 혼령들로 여겨졌다. 여제가 공덕에 보답하는 다른 국가 제사와 달리 위령제의 성격을 띠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의 모습
여귀라는 말은 오늘날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넋을 함께 위로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큰 사고나 재난 뒤에 열리는 합동 위령제, 이름 없는 전몰자를 위한 추모 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의식은 여제가 하던 일을 현대의 방식으로 잇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작물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오는 귀신 떼나 저주받은 마을의 원혼 무리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사극이나 공포물에서 여단과 여제를 소재로 삼아, 제사를 받지 못한 혼령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이야기를 꾸미기도 한다. 옛 국가 제사의 이름이 요괴 사전의 표제어처럼 쓰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